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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타자기 발명가 공병우박사가 자서전을 쓰는 까닭 네 가지 이유낙서장 2025. 8. 24. 07:24
나는 죽은 뒤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이날까지 살아왔다. 살아 있는 동안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나아가 우리 나라와 겨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다가 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인 서구 사람들처럼 나도 유서를 미리 써 놓았다. 그 내용에 재산 나누기에 관한 것은 별로 없다. 내 명의로 된 부동산 따위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유용하게 쓰거나 복지 사업을 위하여 사용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적어도 재산 분배 문제로 자식들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유서는 결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 분배 명세서는 아니다.
나의 임종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 여유 있는 상황이라면 곧 바로 병원으로 이송하여 나의 눈이나 몸속의 장기가 다른 사람 생명을 구하는 데 쓰도록 조치해 달라고 당부했다. 나의 숨이 끊어질 무렵에 차질이 없도록 의사 손에 맡겨 잘 처리해 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내 몸이 변질되기 전에 갈기갈기 찢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부분은 화장을 하여 재를 강물에 뿌려 달라고 자식들에게도 당부하였다.
나에 대한 평가는 죽은 다음에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정확하게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생애를 미주알고주알 다 드러내 놓고 조명해 가며 자기 미화를 꾀하려는 듯한 어떠한 시도도 나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기에 나는 자서전이나 회고록 따위와는 사실 인연이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나이 80이 넘은 지금 내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기로 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뜻이 숨어 있다.
첫째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을 500여 년 동안 줄곧 천대만 해온 우리 민족이 이제부터라도 한글만 쓰면서 한글 기계화의 입력과 출력을 세벌식으로 꾀하여야 겨레의 문화를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 을 우리 민족 앞에 유언처럼 선포하고 싶은 것이요,
둘째는, 나에 관한 기사가 책 또는 잡지나 신문에 가끔 나온 것을 볼 때마 다 사실과 다른 점이 더러 눈에 띄었기에 잘못된 자료가 진실로 둔갑할 우려 가 있어, 내 스스로가 진실을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기를 들면 "한글 타자기의 시조 공 박사는...”라고 운운한 글을 보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글이다. 나보다 먼저 한글 타자기를 만든 분들이 있었다. 내가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발명했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고성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부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과학적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싶은 것이요,
셋째는, 나는 지금까지 싸움을 많이 했는데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싶어서이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것이 과학기술처에서 정한 비과학적인 표준판을 폐지하라는 한글 기계의 글자판 싸움이다. 이 싸움을 근 20년 가까이 해 오면서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승산도 없는데 왜 싸우느냐?” “그렇게나 오래 싸웠는데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느냐?” 등의 이야기를 특히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꼭 이기려고 싸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한글 기계화 정책을 잘못해서 나라를 망치는 것을 보고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싸운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역사에 한 줄 기록이라도 올바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싸운 것뿐이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한글을 아직도 천대하고 있는 남한 동포들에게 한글 기계화에 관한 올바른 과학을 어찌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밝혔으면 함이요,
넷째는, 내가 안과 의사로서, 세벌식 한글 타자기 발명가로서, 한글쓰기 소프트웨어를 직결 방식으로 개발한 자로서, 그리고 세벌식 자판 통일을 완성한 연구가로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협조를 받았고, 6·25 난리 때는 죽을 고비에서도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 와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 많은 은인들에게 내가 걸어온 자초지종을 알려 드리는 동시에 감사의 뜻을 올리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흔히 말하는 사교술이나 처세술을 몰라서 가족들로부터 가끔 핀잔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는 신조로 살아왔다. 그리고 민족 문화의 빠른 발전을 위해 한글 전용과 한글 과학화 연구에 나의 정열과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썼다. 한편,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자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내 형편 닿는 대로 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민족 문화와 복지 사업에 다소나마 일하게 된 직접적 인 뿌리는 내 할아버지께서 "적선을 한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라는 어렸을 때부터 들려주신 교육적인 말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때 할아 버지께서 "평소에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전쟁과 같은 살아 남기 힘든 때를 만나도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말씀을 귀가 아플 정도로 들려 주셨다. 나는 그 덕분으로 6·25 때,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으로 공산 치하의 감옥 속에서도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그 교육적인 의도가 담겼던 말씀이, 세상을 약삭빠르고 악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교술보다 훨씬 값진 것이란 점을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 도, 이 책의 발간 취지에 섞여 있다.
나의 걸어온 길을 더듬어,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어떤 가식이나 주저함이 없이 기록하여 세상에 밝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내가 지난날 체험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나의 고백이,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 이라 생각한다.
내가 평소에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여러 가지 자료를 제대로 모아 두지 않은 탓과 내 나이 여든이 넘어 기억력이 쇠퇴한 탓에 본의 아니게 중요한 부분이 빠졌을 수도 있고, 잘못 적은 부분이 있을 듯해 염려스럽다. 뒤늦게라도 그런 부분이 발견되면 고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라도 잘못된 부분은 바로 고쳐지기를 바란다.
끝으로, 내가 내 식대로 살아오게끔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 리며, 내가 내 식대로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랑과 도움을 주신 조부모님과 은사님들, 내 아내, 그리고 내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또 이 책을 내기까지 직접, 간접으로 도와 주신 여러 사람들과 특히 원고 정리에서 편집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면서 거들 어 주신 '미주 한글 문화 연구원 원장 신태민 선생과 '한글 기계화 추진회' 회장 송현 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1989. 8. 15. 서울 종로구 와룡동 95번지에서 공병우
추신: 자서전에서 읽었던 내용을 올려놓습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오자 탈자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것은 모두가 조부모, 형제, 은사, 가족, 친척, 친구, 동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은덕과 혜택이라고 생각한 다.
내 나이가 80이 넘도록 행복하게 살아온 뿌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있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셨고, 자라나게 하셨고, 내가 많은 일을 하도록 해주셨고, 나를 늙게 하였으며, 언젠가는 나를 데려간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일 무엇을 하게 허락하시고, 또 무엇을 먹게 해 주실지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나는 단지 하느님의 허락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서 특히 나에게 베풀어 주신 여러 가지 섭리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1. 의주 농업 학교 재학시, 교장 선생의 비리를 꼬집어 쓴 작문을 담당 선생에게 바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섭리.
2. 조직학은 의사 검정 시험의 과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학문이 의학의 뿌리 구실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섭리.
3. 의학 박사라는 학위의 명예에 유혹되지 않고, 실력 위주로 안과학을 공부하게 해 주신 섭리.
4. 한글 타자기의 연구에 있어, 글씨 모양보다도 속도를 위주로 개발케 함으로써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게 해 주신 섭리.
내가 받은 상들
(1) 내가 사양한 상
바깥 세상하고는 별로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온 나였지만, 밀폐된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개발품은 세상에 흘러 나가게 된다. 끈덕지게 인내와 집념으로 버티어 나가야만 하는 연구 생활이라고 하지만, 민족을 위한 것이어서, 반드시 나의 분신과 같은 발명품이나 개발 특허품들은 세상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상도 여러 개를 받았다. 사실, 상에 대해서도 공로를 인정해 준 것은 고맙지만 상을 받으러 나갈 정도로 나는 한가한 사람은 아니다. 상보다는 연구 개발한 것을 많은 민중에게 보급하여 그들에게 문명의 이기의 혜택을 진정으로 받도록 해 주는 데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언제나 앞섰다.
과학 기술처에서 과학의 문화상을 받으라고 하는 것을 굳이 사양하였고, 또 5·16 민족상을 받으라고 교섭을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상을 타는 자리에 대체로 참석을 못하고 대리인이 수상하곤 했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을 추모하는 외솔상과 적십자 박애상은 만사를 제쳐놓고 내가 식장에 나가 직접 상을 받았다. 그러나 진짜 상은 내가 죽은 뒤 하느님의 판정을 받은 뒤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조금이라도 내 개발품들의 이치를 깨닫고, 활용하여 많은 도움을 얻으면, 이 이상의 영광된 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2) 연도별로 본 표창과 수상
1) 1949. 10. 국회의장상 수상(전국 과학 전람회에 한글 타자기 출품)
2) 1958. 10. 대통령 표창 수상(한글 타자기 발명 공로)
3) 1962. 8. 대통령 표창 수상(건국 공로 식산 표창장)
4) 1968. 10.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한글 전용 공로자상)
5) 1970. 7. 평택 군수 감사장 수상
6) 1974. 3. 외솔 문화상 수상(한글 문화 개발 공로)
7)1975. 10. 은장 박애장 수상 (대한적십자사 70주년 기념)
8) 1978. 9. 여군단장 감사패 수상(여군 창설 제28주년까지 여군 한글 타자 기술향상에 기여)
9) 1979. 3. 서울 적십자사 총재 표창 수상(모범 납세자)
10) 1979. 10. 대한 적십자사 총재 표창 수상(특별 회원으로 적십자 사업 발전에 기여)
11) 1980. 2. 종로구청장 표창 수상(새마을 저축 증대 기여)
12) 1980. 5. 평안북도 첫 문화상 수상(첫 평안북도 도민의 날 5. 5.)
13) 1981. 4.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장애자의 날 4. 29.)
14) 1983. 7. 사회 복지 법인 우성원 및 구화 학교 공동 명의로 감사패 수상(우성원 및 구화 학교 준공일 7. 20.)
15) 1984. 10.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맹인 선교회에서 공로패 수상(맹인 개안 및 맹인 재활 사업에 기여한 공로)
16) 1987. 1. 제1회 서재필상 수상(서재필 기념 재단에서 한글 타자기 발명 및 한글 컴퓨터 개발 등 한글 기계화 공로로 수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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