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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문화 선진국인가?스크랩된 좋은글들 2026. 3. 27. 07:27
법보다 중요하고 정치 위에 있는 문화 나라 밖에서는 K컬처가 번성하는데 나라 안에선 왜 점점 과거로 퇴보하나 세계를 누비는 BTS, 요새가 된 광화문 통제와 질서 구분 못하고 법치 사라져 퇴행적 정치인들이 공기와 물을 흐린다
일러스트= 이철원
역사적인 BTS의 광화문 공연이 ‘꼰대’를 가르는 기준을 하나 더 보탠 듯하다. 세종대왕 앞에서 웬 영어 노래냐, 이 시국에 평화 메시지 하나 없냐, ‘아리랑’은 대체 어디로 갔냐, 광화문이 아니라 개선문(네모 박스인) 공연 같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반응이 와닿는다면 꼰대일 개연성이 높다. 아마도 그들은 BTS가 과거 정부 시절 대통령 특사로 텅 빈 유엔에서 발표하고 춤을 추었다는 사실에 별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나랏일에 ‘광대’가 동원되는 건 당연하다 여길 법하다.
이들은 마치 대처(大處)에 나가 크게 출세하고 돌아온 옆집 아들을 구경하는 마을 사람처럼, 이 자식이 고향 어른은 잊지 않았는지, 차림새는 반듯한지, 버릇이 없는 건 아닌지, 팔짱 끼고 관찰한다. 그들은 모를 수 있다. 그 자식이 얼마나 커져 있는지. 광화문을 시작으로 세계 투어에 돌입한 BTS 공연표가 벌써 매진 사태며, 미국 유명 프로그램인 지미 팰런 쇼가 BTS 출연을 흥분하며 예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광화문을 그들에게 내어주었는지, 그들이 광화문에 와주었는지는 보는 시각 나름이다.
평가의 수위와 종류는 다양하겠지만 BTS가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 오스카상 2관왕을 차지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기 강 감독은 모든 영광을 ‘한국인’에게 돌리지 않았던가. ‘골든’이라는 곡을 작곡하고 멋지게 부른 이재는 황실 대례복에서 모티브를 딴 황금빛 당초무늬를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 옷에 박은 한국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수상대에 올랐고, 오스카상 무대에는 판소리가 울려 퍼졌다. 넷플릭스는 BTS 공연 타이틀인 아리랑을 광화문의 도도한 선과 국립국악원의 선율과 함께 세계 190개국으로 실어 날랐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한 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우리는 문화강국이 맞는 걸까? BBC는 광화문 행사를 ‘성공한 소프트 파워’라고 전했다. 그런데 우리의 소프트 파워는 정말 건전한가?
공연 당일 광화문의 분위기는 묘한 기시감을 자아냈다. 공연장 주변을 철통같이 막아 놓고 검문하는 경찰 수천 명이 겹겹이 배치된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문화 강국 이전에 시위 공화국이었던 우리가 숱한 시위 현장을 관리 감독하며 갈고닦은 실력이 다시 빛을 보는 현장 같았다. 안전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저녁 8시 공연을 위해 오전부터 모든 행인의 가방을 열어보고 검색대를 통과하라고 하는 건 과하다. 이런 발상, 문화 선진국에서도 할까?
방탄소년단(BTS)이 전날(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앨범 발매를 기념해 컴백 무대를 앞둔 가운데 팬들이 공연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뉴스1
영국의 문화 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를 모든 단어 중 가장 복잡하고 논쟁적인 단어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란 춤과 노래를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안 그래도 추상적인 개념을 18세기 영국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는 더 복잡하게 정의했다. 그는 문화를 ‘매너’라고 불렀다. 그 매너란 “법보다 중요하고 정치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우리를 마치 매일 마시는 공기처럼 화나게도 달래기도, 더럽히기도 정화하기도, 거칠게 하기도 세련되게 하기도 하는 지속적이고 꾸준하고 변함없고 인지하기 힘든 작용”이라고 했다.
트럼프 미국의 문화적 쇠퇴를 염려하는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문화를 “우리 모두가 함께 수영하는 공동의 물”이라고 표현한다. 그 물 안에서 개인은 가치관, 감정, 의견, 사랑, 목표와 열망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형성한다. 개인은 또 물과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물을 변화시키고 만들어가는 역할도 한다. 개인과 문화는 그렇게 상호 작용한다고 그는 보았다.
‘소프트 파워’란 미국의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가 대중화한 용어로, 글로벌 시대에 국가가 군사력보다 외교정책, 정치적 원칙, 문화적 자본을 활용해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일컫는다. 지정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전이나 허위정보, 소셜미디어 같은 소프트 파워를 무기처럼 쓰기도 한다. 그 힘이 하도 막강하여 하드 파워와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국가의 매력과 정체성은 민주적인 법치와 공정한 제도 같은 소프트 파워가 담당한다.
이상의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우리 문화를 진단해 보고 싶어졌다. 춤과 노래, 영화와 미술을 넘어서 우리의 생활 양식을 지배하는 문화는 무엇인가. 마치 우리가 함께 수영하는 물처럼, 모두를 통합하고 연결하는 문화가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 문화는 정치보다 위에 있고, 법보다 중요한가. 숨쉬기 편한 공기처럼 그 안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그런 문화가 있는가. 법치라는 소프트 파워는 존재하는가. 문화 국가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배려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문화 강국이 맞는가?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3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윤석열 정권 정치검찰 조작기소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계획서 승인의 건이 통과되고 있다. /뉴스1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드는 건 BTS가 영어 노래를 해서도, ‘케데헌’의 주역이 모두 나라 밖 한국인이어서도 아니다. 나라 밖에서 번성하는 ‘K컬처’와 나라 안 ‘한국 문화’가 심한 부조화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회는 양극화되어 있고, 사람들은 대화를 잊었으며, 정치인들은 염치와 절제를 상실한 지 오래다. 정의를 실천해야 할 법은 오히려 강자와 범죄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통제와 질서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개인이 해결하지 못한 자유라는 이슈, 그리고 여전히 퇴행적인 정치인들이 나라 안 공기와 물을 흐린다.
우리는 과연 문화 선진국인가? 그 답은 ‘트로피들로 가득한 가방을 들고’(BTS MIC Drop) 전 세계를 누비는 BTS와 하룻밤 요새로 변신한 광화문 그 사이 어디쯤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2026년3월 27일 조선일보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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