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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아카데미를 수강하며낙서장 2017. 3. 9. 15:37
요즘은 세상이 촛불이다 태극기다하며 어수선하여 불안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처떻게 처신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생각을 해보기도합니다. 몇주전 옛 회사상사분과 전 광복회회장님을 점심시간에 뵙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세상돌아가는 말씀과 안중근의사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이란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가서 안중근평론을 읽어보기도 했고, 안중근의사의 자료를 검색하던중 안중근아카데미수강공고를 보고 신청했습니다. 3월 7일 그곳에 처음 참석하였고, 수강자료도 받았습니다. 안중근의사에 대해 수강자료와 인터넷 검색자료를 정리하여 올려놓습니다.
2017년 3월 9일
안중근의 생애와 사상
1. 안중근의거 무엇을 기억해야 할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를 할빈역에서 이토이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독립투사로 기억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독립투사이기이전에 전새대를 앞서간 사상가이고 전세게 제국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올린 평화주의자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등방문을 처단함으로서 대한의 독립의지를 세게만방에 알렸고 국내외 항일운동이 기폭제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개인적 감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러일전쟁 직후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나아가 중국 만주까지 넘보는 한국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이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파탄시킬 인물이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담긴 주된 사상은 바로 이 같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의 사상이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처음부터 하얼빈 의거가 개인 차원의 거사가 아니라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J으로 결행한 국가 차원의 거사임을 주장했고 더욱이 거사의 이유도 한국의 독립만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웅변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이 첫째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둘째 중국 만주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며, 셋째 그런 다음 서로 ‘독립한’ 중국·한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 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과감하게 자신을 던져 한국의 독립을 갈구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며, 세계평화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동양평화를 바라던 안중근 의사의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순국 직전에 마지막으로‘동양평화 만세 3창을 하겠다고 한것만 보더라도 알수가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본인 감옥서장이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2. 출생과 가문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 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안 의사는 바로 이 안 진사와 그 부인 조(조마리 아)씨 사이 에 태 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안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혁신 유림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갑신정변 직후 안 의사 집안은 해주의 세거지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친이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던 관계로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때문에 안 의사는 청계동에서 성장하면서 8세 때인 1886년부터 약 8~9년 동안 조부의 훈도로 사서삼경 등 유학과 자치통감 • 조선사 · 만국역사 등 사서를 읽히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아울러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안 의사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지성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3. 反동학군 참여와 천주교 입교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안 의사의 부친은 군대(갑오의려)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안 의사의 부친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안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안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여 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큰 콘욕을 치르게 된다. 즉 이 같은 사실이 중앙정부에 알려지자 당시 갑오내각의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은 양곡 반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양곡을 군량미로 다 사용한 안 의사의 부친은 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화파 동지인 김종한(金宗漢)의 도움을 받아 이를 무마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자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閔泳駿)이 다시 양곡 반환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 의사의 부친은 인근 마렴에 있던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안 의사의 부친은 프랑스 외방선교회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나아가 빌렘 신부 등 천주교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청계동으로 귀가한 부친은 1897년 1월 안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이에 따라 안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받았다.
4. 천주교 포교와 계몽운동
안 의사는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와 함께 불어를 배우며 천주교의 포교에 힘썼다. 전도 활동 중에 안 의사는 일반 민중들과 광범위하게 접하면서 그들의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을 깨닫고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 의사는 민1중 계몽에 종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상경하여 뮤텔(G. Mutel) 주교 등 외국인 신부들과 상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함에 따라 대학교 설립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 일로 안 의사는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불신을 갖고 배우던 불어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안 의사의 천주교에 대한 신념은 굳었고, 신도들에 대한 사량은L깊었다. 인근금광의 감리(藍理)가 천주교를 심하게 비방하자 안 의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찾아가 설득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 고위 관리에게 처와 재산을 겁탈당한 천주교 신도의 딱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상경하여 권력층과 당당히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천주교를 전파하고, 그 교리인 박애주의를 실천하는데 안 의사는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안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고 신문 잡지 등을 탐독하면서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안 의사는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안 의사는 청도(靑島) . 위해위(威海衛) 산동{山東)지방과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선전 활동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영익등 상해지역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뒤 안 의사는 1906년 4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三興)학교를 설립하고 천주교계통의 돈의(敦義)학교 교장을 맡아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 (三合義) 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안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5. 의병활동
안 의사는 1907년 함경도 원산에서 선편으로 청진, 그리고 육로로 회령을 거쳐 북간도로 건너갔다. 여기서 북간도 일대를 3개월 동안 시찰한 뒤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였
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안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崔在亨)의 후원으로 동의회(同義會)를 결성하고 1908년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흔히 이범윤(李範允) 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안 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의병부대였다. 김두성(金斗星)이 총독,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參議中將)이었던 안 의사가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 연추(煙秋)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08년 7월 안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안 의사를 비롯한 여러 의병장이 부대를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부근 홍의동과 신아산으로 진공한 것이다. 안 의사 의병부대는 몇 차례 승전을 거두고 일본 군인과 상인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안 의사는 이들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무기까지 내어주었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안 의사가 신봉하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포로 문제로 안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샀고, 그 가운데는 부대를 나누어서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석방된 포로들에 의해 일본군에게 의병부대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기습공격을 받고 회령 영산에서 일본군과 4~5시간 격전을 치렀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온갖 고초 끝에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연추의 본거지로 귀환한 안 의사는 곧 바로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안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5일경 안 의사는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단지동맹을 맺고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하늘과 땅에 조국독립과 동양평화를 맹세하면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안 의사가 회장을 맡은 동의단지회 12인의 회원은 안응칠,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조응순, 황병길, 백규삼, 김백춘, 김천화, 강창두 등이다. 나아가 이 시기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틱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j (大東共報)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韓人民會)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6. 이등박문 처단 의거
1909년 10월 초 대동 공보 사에 들렀다가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 의사는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 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안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사장 겸 총무인 유진율(兪鎭律)은 거사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기자인 이강{李剛)은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에게 의사의 안내를 부탁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되순(禹德淳)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안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안 의사 일행은 도중에 수분하(綏芬河)지방에서 통역을 맡아줄 유동하(劉東夏)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金衝在)의 소개로 조도선(曺道先)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켰다. 그리하여 안 의사를 중심으로 이토 포살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 처음 안 의사는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만주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남장춘(南長春)과 관성자(寬城子), 그리고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構) 등 4개 지점에서 거사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모자랐고, 또 실행 인물도 부족하여 부득이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였다. 철도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로 열차가 정차하는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안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오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구내의 여관 문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안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안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를 갖고, 9시 30분 경 코코프체프의 인도로 역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러시아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안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키자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안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천상준언(川上俊彦) 하얼빈 총영사, 전중청차랑 (田中淸次뭘이 만철 이사, 삼태이랑(森泰二郞)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안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7. 순국과 동양평화론
안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안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푸엇하랴’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농 뻔 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안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 와 「동양평화론」 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 는 안 의사의 자서전이고, r동양평화론」 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논설이었다.
옥중에서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역사」 를 끝내고,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 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 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안 의사는 당초 “동양평화론”을 1, 서(序) 2, 전감(前鑑) 3, 현상(現狀) 4,伏線) 5, 문답(問答)으로 구성하여 논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필 도중 형 집행으로 말미암아 실제는 서와 전감의 일부만 남기게 되었다. “동양평화론” 을 통해 거사의 이유를 새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안 의사는 자신의 시대를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인 약육강식의 시대로 이해하고, 그와 같은 생활방식에 따라 발생한 러일전쟁을 서양과 동양의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하는 일왕의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문에 따라 한 · 청 두 나라 국민은 일본을 지원하여 일본의 승전을 도왔음을 거론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패전하고 동양은 서양에 패하여 동양평화는 영구히 깨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이에 공헌한 한 · 청 두 나라 국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한 · 청 두 나라 국민은 동양평화의 수호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승전한 후 곧 약속을 파기하고,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여 동양 평화를 파괴하였는데, 그 원흉이 바로 이토라고 보았다. 때문에 안의사는 이토가 한국의 국권을 박탈한 주범이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원흉이므로 처단하였음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 의사가 생각한 동양평화의 길은 어떤 것인가. 안 의사는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 그런 다음 서로 ‘독립한’ 청국·한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 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안 의사가 순국한 뒤 세계사의 진행 상황을 보면 이는 참으로 빛나는 견해였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은 안 의사의 이러한 충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지속적인 전쟁의 확대와 그로 인한 인류의 피해로 결판났을 뿐이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동양이나 서구, 그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의 전개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에도 안 의사의 사상은 새삼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8. 저술과 유묵
안 의사는 하얼빈 의거의 뜻과 그의 동양평화에 대한 경륜을 기록과 저술로 남겨 사후에 전하려고 침울한 감방에서 하얼빈 의거를 포함하는 떳떳한 일생의 행적을 밝히는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 를 저술하였다. 이어 의거의 뜻을 집중적으로 밝히는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저술은 일제의 위약(違約)으로 사형이 집행되어 〈서(序) 와 2, 전감(前鑑) 만 기술되고 나머지 본론의 대부분이 될 2. 현상(現狀) 3. 복선(伏線) 4. 문답(問答)은 제명만 달고 복고(願鎬)로만 간직한 채 순국하였다.
그리고 안 의사는 생사(生死)에 임한 감방에서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魚思) 와 〈위국헌신군인본분(寫國歡身軍人本分) 을 비롯한 신품(神品)과 같은 유묵(遺墨)을 현재 알려진 것만도 59여 폭을 썼다. 여기에는 하나같이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의 단지장인(斷指掌印)이 찍혀 있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의 취지가 서려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하얼빈의거를 전후하여 얼마의 귀중한 시문을 남겼다.
안중근 의사는 의거 후 뤼순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 기고하여 1910년 3월 15일 탈고한 자서전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고 표제하였다. 그는 1907년 8월초 군대해산의 참상을 목도하고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하얼빈 의거 시까지 3년 동안 ‘중근(重根)’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자인 ‘응칠(應七)’로 행세하였던 까닭에 이와 같이 표제한 것이다.
안 의사의 유묵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등 국내 각처에 소장된 〈국가안위 노심초시{國家安危 勞心集思) 를 비롯한 26폭의 유묵만이 현재까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 나머지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 을 비롯하여 최근 알려진 〈독립(獨立) 등 30여 폭은 한.중.일에 산재되어 유묵, 혹은 유묵의 영인본으로만 알려져 국가보물로서의 심의절차를 마치지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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