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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자원봉사
    낙서장 2025. 1. 22. 16:04

    한전 퇴직 후 해외 봉사로 '2의 인생' 찾은 양병택(69)

     

    지난 21일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서울 청계천 문화관에서 급하게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원예 기술을 배우고자 우리나라를 찾은 아프가니스탄 영 농인들이 문화관을 방문하는데, 통역과 설명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하는 날(·수 요일)은 아니었지만 흔쾌히 요청에 응했다. 그분들은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초청으로 방한했는 데, 나는 KOICA 해외 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서 일 한 적이 있었다. KOICA 초청이라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벌써 6년이 지났지만, 당시 경험은 내 인생에서 아주 큰 전환점이 되었다.

     

    199812월 나는 30년 가까이 다닌 한국 전력에서 명예퇴직했다. 세상은 뒤숭숭했다. IMF 외환위기 이 후 '폐업' '구조조정' '명퇴' 같은 단어들이 연일 신문지상을 도배했다. 당시 나는 전산 업무를 담당하는 정보처리처의 처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 까 우리 부서의 업무도 통째로 '아웃소싱' (외부 위탁)이 결정됐다. 명색이 부서의 장()으로서 책임을 느꼈고,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생각에 명예퇴직을 결정했다.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되돌아보면 쉬지 않고 달려 온 인생이었다. 나는 경기도 용인에서 서울로 올라와 국립체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국가에서 전액 장학 금을 주는 대신 졸업 후 일정 기간 체신부에 근무해 야 하는 특수목적 학교였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내가 들어갈 때 입시 경쟁률은 501이 넘었다. 국립체신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앙전화국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야간대학에 다녔고, 군대도 다녀왔다. 그리고 의무 근무 기간을 채운 뒤 19692월 한전에 대졸 공채 사원으로 입사했다. 그 후 27년간 전산 관련 부서에서만 근무했다. 1970~80년대 남들 보다 일찍 전산을 접한 터라 지금도 IT에는 밝은 편이다. 얼마 전에는 명함 뒷면에 'QR코드'도 넣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몇 달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별다른 할 일이 없는 상황을 처음 겪었다. '할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 1년은 영어 공부에 빠져 지냈다. 내가 다닐 때 체신고등학교는 기능 교육 위주여서 체계적으로 영어를 공부하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 늘 "제대로 영어 공부 한번 하리라" 는 생각을 품고 평생을 미뤄왔다. 늦게 시작한 대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원에 다녔고, 1년 만에 미국 대학 진학이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때쯤 KOICA에서 해외 봉사단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지원 자격은 21~61세였고, 나는 만 61세까지 6개월여가 남아 있었다. 전공과 영어·적성 검사를 거쳤고, 외국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가족 동의서까지 제출했다. 그렇게 나는 KOICA 의 최고령 봉사단원이 되어 2002~2004년 스리랑카에 가서 '한국·스리랑카 직업훈련원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다.

     

    KOICA는 한국인 봉사자끼리 어울리는 것을 금지 하고 철저히 현지에 동화할 것을 요구했다. 젊었을 때 화려함만 생각한다면 엄두도 못 낼 생활이었다. 나는 2년을 꼬박 현지인 집에 방을 얻어 자취했다. 대학 다닐 때도 해보지 않은 것을 환갑 지나서 한 셈이었다.

     

    쌀을 사려면 수도인 콜롬보까지 갔다 오는 데 하루를 꼬박 들여야 했다. 마을 사람들 마음을 열기 위해 집집이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왔다"고 알리고, 설이면 가족사진도 찍어줬다. 강의를 하면서 알아들었느냐" 고 해도 고개만 가로저을 뿐인 학생들을 보며 답답했는데, 그 나라에선 '예스'''나 모두 고개를 젓고 다만 거절이나 부정할 때는 고개를 더 빨리 젓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들과 생활하면서 행복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봉사는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귀국 후 지금까지 일주일에 2~3차례씩 자원봉사를 핑계로 청계천에 나가 외국인들에게 서울을 소개하고 있다. 틈틈이 크고 작은 '새로운 도전'도 시도하고 있다. 퇴직 후 취미를 붙인 마라톤은 몇 차례 완주에 성공했다. 지난 2007년에는 안나푸르나 등반을 시도, 베이스캠프(해발 4130m)까지 다녀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우리 형제의 손을 잡고 걸어 다녔던 서울~ 용인의 160리 길을 한번 뛰어보자는 생각에 혼자 100 km를 쉬지 않고 달려보기도 했다. 요즘은 외발자전거 타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내 삶은 어떤가' 라고 묻고 싶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으로 그 삶을 채우고, 무엇 에 도전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  

    조선일보  20111027일 앙코르 내인생   신동훈 기자 

     

     

    [인물 포커스]한국국제협력단 최고령 봉사단원 양병택씨

     

    “옛 시절의 화려함만 떠올렸다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었겠죠.”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40여km 떨어진 작은 공업도시 마콜라 사프가스칸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태극기를 게양하는 한 한국인이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봉사단원인 양병택(楊炳澤·63)씨. 지금까지 KOICA가 외국에 보낸 봉사단원 가운데 최고령자다.

    양씨가 스리랑카에 간 것은 2002년 11월. 한-스리랑카 국제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가 지어준 한스기술직업훈련원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어요. 무더운 날씨뿐 아니라 현지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는 ‘예’ ‘아니요’를 구분하는 것부터 헷갈렸다. 컴퓨터에 대한 기초개념을 열심히 설명한 뒤 이해하겠느냐고 묻자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드는 학생들의 반응에 설명을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것은 긍정을 뜻하는 몸동작이었다.

     

    건기(乾期)에 속하는 3월 날씨가 섭씨 30도를 웃도는 나라 스리랑카. KOICA가 봉사단원을 보내는 국가 중에서도 오지(奧地)에 속하는 데다 말라리아 콜레라 등 풍토병 때문에 젊은이들도 선뜻 나서지 않는 곳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양씨는 왜 이곳에 왔을까.

     

    “살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참 고마웠죠. 어떻게든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으로 꼽히는 한국전력에서 30여년간 일한 양씨는 98년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이 진행되자 ‘후배 직원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명예퇴직했다.

     

    “서울 청량리에 다일천사병원을 짓는다는 신문기사를 봤어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병원이었는데 건축비가 모자란다는 내용이었죠.”

     

    그는 ‘천사회원’이라는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는 아내 정정희(鄭貞熙·60)씨와 두 아들, 큰며느리도 천사회원으로 끌어들였다. 양씨 등 수많은 천사회원의 후원에 힘입어 다일병원은 2002년 초 준공됐다. 양씨는 후원에 그치지 않고 직접 병원에서 봉사를 하겠다며 2002년 2월부터 봉사자 교육을 받았다.

     

    “그해 4월이었던 것 같아요. 스리랑카에서 컴퓨터 교육을 담당할 봉사단원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봤죠.”

    자식들은 아버지가 ‘늦바람’이 났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KOICA 스리랑카 소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이 들었다고 떨어뜨리지 말고 기회를 달라”며 남편을 후원했다. 그녀는 이미 삼성서울병원이 개원한 94년부터 어린이병동 소아학습실에서 백혈병 환자를 위한 자원봉사를 해오고 있었다.

     

    “가장이 직장을 잃었을 때는 조금 막막했어요. 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못해본 일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요즘은 토요일마다 ‘전화 데이트’를 해요. 매번 비슷한 말이 오고가죠. 남편은 ‘건강하게 잘 있다’며 집 사정을 묻고 저는 ‘집 걱정은 하지 말라’며 건강하라고 당부하죠.”(아내 정씨)

     

    지금까지 양씨가 배출한 학생은 40여명. 현지 고등학생과 전문대생, 취업준비생 등이다. 가장 어려운 점은 열악한 교육여건. 훈련원의 컴퓨터는 96년 설립 당시 들여온 486급이다. 별다른 교재도 없다. 강의 내용을 적은 노트가 고작이다.

     

    “올해 1월 졸업한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설문 문항에 ‘왜 사는가’를 끼워 넣었죠. 예상치 못했는데 ‘부모에게 공경하고 나라에 헌신하기 위해’라는 대답이 무척 많았어요. 또래의 한국 젊은이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해지더군요.”

     

    양씨는 11월 한국에 돌아온다. 귀국 뒤에는 다일병원에서 노숙자와 빈민을 돕는 호스피스로 일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건방진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자세라면 퇴직 이후의 삶도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04년 3월 17일  동아일보  차지완기자 cha@donga.com

     

    2002년 년말 KBS 방송에서 소개된  양병택 해외자원봉사  동영상 

     

     

    국내 케이불 방송국에서 소개되었던  청계천 자원봉사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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