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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전대통령 생가 기념관 문화답사
    낙서장 2017. 11. 7. 21:14

    시청에서 정부수반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그일환으로 마포서교동 최규하전대통령가옥과 신당동 박정희전대통령가옥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자원봉사요원을 선발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들 자원봉사요원 단합차원에서 오늘 문화답사를 구미에 있는 박정희 전대통령생가 기념관으로  했다. 


    출발은 지하철 2호선  시청역 10번출구 에서 8시에  만나 출발했고 구미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넘었다. 가다가 예약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박정희 전대통령 생가기념관으로 갔다. 그곳의 안내원으로 부터 해설을 들었고  민족진흥관으로가서  홍보영상을 관람했다. 360도 파노라마 형식으로 되어있어 화면속에 내가 있는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환경조성은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에 비해 조금은 초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 3시경에 그곳을 출발하여 서울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정담을 나누었다.   


                                           2017년 11월 7일


    추신:  자주국방< 핵문리학자 이휘소박사와 박정희 대통령>



     

     

    이휘소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박사님을 뵈온 지 벌써 4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 박사님의 소식은 이 곳에서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본인이 선포한 유신에 반대한 것 때문에 저대로 많은 고민도 했습니다. 본인은 언제까지 대통령직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본인이 대통령직을 그만 두느냐 계속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것은 국방에 달렸다고 사료됩니다. 지금 나라는 어지렵고, 국방은 허술하고 언제 공산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박사도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에는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이미 미군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일부대는 이미 철수를 끝낸 단계이고, 지상군 17000명이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월남에서와 같이 한국이 공산화되어도 좋다는 전제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제 얼마후면 한국에 남아있는 핵도 철수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본인도 미국정부측에 몇 번 자제를 호소하고, 부탁도 하여 보았지만, 더 이상 구걸하는 것도 추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도 무엇하지만, 그래도 애원해서 들어줄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본인은 어떠한 일이라도 할 각오입니다

     

    이박사님도 아시다시피 본인이나 한국정부가 요구해서 들어줄 단계도 이미 지났습니다. 가능성도 없는 구걸 행각으로 국가의 이미지만 손상을 보는 추한 모습을 또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제인가는 이런 때가 오리라는 생각으로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독자적으로 유도탄 개발과 핵무기개발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재미과학자들을 본국에 초청한 것이나 귀국시킨 것도 이런 저의 뜻을 일부입니다 이박사님을 초대하거나 모시지 못한 것은 박사님을 초대한다는 것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결과나 마찬가지라는 중론에 못이기어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사실 박사님의 능력을 추앙하고 박사님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나 조국은 위태로와 졌고 사정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이미 카터와의 싸움은 시작이 되었고, 여기서 비굴하지 않고도 우리는 승리해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굴한 기운만 보이면 깔고 뭉게는 묘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의존하던 시대에 종막을 고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우리자체가 독자적으로 미사일개발, 핵무기개발, 인공위성개발까지 해서 감히 누구도 우리를 넘볼 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시는 6.25의 쓰라린 경험 같은 것을 맛보지 않게, 우리 백성들이 전쟁으로 살상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이박사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이휘소박사님, 조국을 건져 주십시오. 74년엔가 박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이박사를 보호하기 위하여는 60만 대군이라도 동원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진심입니다. 우리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이박사의 마음에 달리어 있습니다. 그 동안 재미물리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미사일개발부터 서둘렸고, 또 시험도 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박사님의 힘이 필요할 때입니다. 박사님의 처한 위치가 어떠한 지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도 조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눈뜨고 보고만 계시지만은 아니할 것입니다

     

    이박사님께서 조국을 위해, 한 번 일어서 주십시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은 상황 앞에서,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절대 위기의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박사님께 애원합니다. 박사님의 건강과 가운이 길이 빛나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1977년 3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 정 희 배상

     

    이휘소는 그날 (1977.3.20) 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조국이 나를 필요로 할 때라는 절박한 내용이었다. 내가 핵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은 처음에는 적성에 맞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나의 목적은 핵연료를 이용한 인류의 구원이었다.

    핵에너지를 이용한 자원의 개발, 자원의 새로운 창조는 무한히 열리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에 내 생애를 바치었다. 또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니, 지금 조국이 내가 겪은 6.25나 그보다 더한 비극의 문턱에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미국은 월남에서 손을 떼었고, 또 한국에서도 손을 떼고 있다. 명백한 사실은 조국이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철수... 조국의 공산화...

     

    이런 것을 보면서 핵을 자원의 개발에만 목적을 두었던 나의 신념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일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조국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의 원리를 제공한다면... 그것이 조국을 지키게 하는 힘이 된다면...

    비록 박대통령이 유신을 철폐하지 않을 경우라도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의 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르지만...죽는다...

    내가 죽음으로 조국을 살릴 수 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죽어 조국이 조국으로 남고,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면...나는 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일까?

     

    하늘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너만이 지금 너의 조국을 구할 수 있다는 명으로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일까? 조국은 나에게 너는 너의 능력을 이때에 쓰지 않으면 너는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살신성인... 견위치명... 멸사봉공... 진인사대천명...

    나의 운명... 어머니... 아내, 아이들, 그리고 형제들...하늘이여...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를 안내하여 주소서...

     

    이 책을 읽으면서 박대통령과 이휘소박사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이휘소는 하얗게 밤을 새웠다.

     

     

    1977년 5월 15일

    이휘소는시카코변두리에서 와과의 개업을 하고 있는 김박사를 찾아갔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사실은 의논을 드릴것이 있습니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솔직히 그동안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조국의 현실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의 성능까지 설명했다. 이휘소는 대강 이런 설명을 하고 투명용지에 쓴 서류를 내밀었다. 가로 10여센치 세로 4센치 정도의 밀봉되었는 문서였다. 그것을 이휘소가 따로 정리한 것을 다시 50분의 1로 축소하여 만든 것이다.

     

    “이것을 다리의 뼈속에 넣어주십시오.”

    “건강에나 몸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얼마동안은 지장이 없겠지만...”

    “박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십시오.“

     

    김박사는 침통하게 이휘소를 바라봤다. 김박사는 다른 의사와 간호원까지 출입을 금지시킨 가운데 이휘소의 다리에 마취주사를 꽂았다. 살이 베어지고, 소독이 된 서루를 안치하고, 수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휘소는 집으로 돌아왔다.

     

     

     

    1977년 5월 19일 동경에 도착한 이휘소...

    다음 날 발표할 학술논문을 정리하고는 한국 청와대에 전문을 쳤다.

     

    "5월 21일 PM11시 정각 나리다공항 대기" 나리다공항 KAL 안내소에는 몇 명의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휘소가 비행기에 오르자, 바로 출발하였다. 한 시간이 좀 지난 후 김포공항에 내리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는 청와대정원에 내려 앉았다.

    박대통령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바로 지하실로 내려간 이휘소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사 두 사람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되었다.수술은 간단히 끝났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다리 속에서 빼어낸 곁에는 피가 번진 문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박사... 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그 피가 뭍어있는 밀봉된 문서를 얼굴에 갖다대고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휘소는 바로 헬기를 탔고, 또 지체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 이휘소는 동경제대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강의를 했다.

     

    이휘소에 딸린 전문기사가 있지만 웬만한 일에는 이휘소가 직접차를 몰았다. 시카코 교외를 지나 일이노주에 진입했을 때 100미터전방에서 트럭이 정면으로 이휘소의 차를 향해 돌진했다.

     

    조국에 장거리 유도탄과 핵무기 개발원리를 제공하고 같은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우리는 박대통령의 인재를 보는 높은 식견과 각자의 생각은 달라도 오직 조국을 향한 마음은 같았던 두분의 우연한 애국심이 진정한 민족 영웅의 모스으로 다가온다.





























    이세대에 국민으로 태어나서 평생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들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해서 선진열강과 같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보자는것입니다. (국방대학원졸업식유시에서(196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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