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메이지유신발상지 탐방 3일째날
    낙서장 2018. 12. 12. 03:23

    메이지유신발상지 탐방 3일째봤던 내용들입니다.




    조선 통신사는 조선 시대에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에 파견한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 교린의 원칙에 따라 주변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여 조공 책봉 질서를 형성하였고,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동등한 위치에서 교역하는 교린 정책을 시행하였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후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외교 관계 회복을 요청하여 광해군 대에 기유약조를 체결(1609)하였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가 탐탁지 않았으나, 포로의 송환, 일본 정세 파악 등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통신사를 맞이하면서 막부의 국제적 지위를 다이묘와 주민에게 과시하였고, 조선 통신사를 통해 명과 조선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조선의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에는 많은 일본인이 나와 구경했으며 일본 지식인층은 통신사 일행의 글을 받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일청강화기넘관은 청일전쟁 강화회담이 열렸던 요정 준범루 옆에 있으며 강화회담 당시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습니다. 특히 강화조약 원문 사본이 전시돼 있는데 저11조에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영시하여 마치 이 전쟁이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일으킨 것처럼 되어 있으냐, 정국의 보호막에서 조선을 꺼내어 짐들to~71 우|한 전초전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전초가 된 장소입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전통적인 호매|질서(華훗採序)으| 동아시아 국제 역학구조에서 조선을 중국의 틀 밖으로 끄집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는데그 결정체가 바로 정일전쟁이었기때문에 조약의 저11조에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명시하게 된 것입니다.

     

    러일전쟁 강화조약인 포츠머스강화조약의 저11조 역시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정일 · 러일전쟁이 결국은 조선의 보호막을 걷어LH어 집틀간)~기 우|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삼평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설이 있는데공주 학봉리에서 잡혀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가네가에(金江)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공주 금강(金江)에서 따온 것이 분영한 이름공주 학봉리와 이삼평이 초기에 정착한 가라쓰야키가 분정사기의 생산지로 유사하며분정사기에 물고기무늬를 애용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1990년 10월 공주에 한일합동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이삼평의 고향이 공주 학봉리로 굳어졌습니다

     

    이삼평가는 사후 5대까지 이어지다 200년간 명맥이 끊어졌고 철도기관사로 은퇴한 13대 후손이 1975년에 가마를 복원하여 명맥을 이었으며현재는 14대손이 전문적으로 자기를 공부하여 대를 잇고있습니다. 1917년 백자탄생 300주넌을 기념하여 아리타의 도산(陶山)신사에 도조(陶祖 이삼평비가 건립되었으며비를 건립하면서 일본이름인 가네가에 산베에 대신에 원래 이름인 이삼평으로 하기로 결정하여 300년만에 이름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던 때가 한일합병로 일본의 선에 대한 일체화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무럽이라점에셔 이삼평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외심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도산신사는 1658년에 건립돼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0년에 새로 건립하였으며 유명한 백자 도리이는 1888년에 아리타지역 도자장들의 연합으로 건립됐습니다. 1956년에 풍으로 무너진 것을 4년 후원상 복구하였으며매년 5월4일는 도조제와 함께 도자기축제를 거행하고있습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