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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지유신 발상지 탐방 4일째
    낙서장 2018. 12. 13. 05:03

                      사가번의 거물 정객,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메이지유신 후 신정부를 주도한 4개 번(샤쓰마, 죠슈, 도사, 히젠)이 주도하는데 1873년의 정한론 논쟁을 분기점으로 삿죠(샤쓰마, 죠슈) 체제로 신정부가 개편되면서 도사와 히젠(사가)번이 밀려나게 되는데, 이때 삿죠 주도의 정국에 반기를 든 자유민권파의 주역이 바로 오쿠 마시게노부입니다.

     

    1838년 사가번의 상급 샤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오쿠마 시게노부는 번교인 고도칸(弘道館)에서 주자학 중심의 전통적 교육에 반기를 들고 개혁을 주장했다가 퇴학을 당할 정도로 어랄때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습니다. 네델란드상관(데지마)이 있는 나가사키를 관할하고 있던 사가번에서 자라 일찍 네덜란드에서 전래한 신학문을 배웠고, 영어 교육까지 받아 메이지유신을 이끈 지도자 중에서는 누구보다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습니다. 쓰키지에 있던 그의 저택은 유신지샤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쓰키지의 양산박’으로 불리울 정도였습니다. 1년간 방문객이 2만명을 넘었다고 하니 인적교류의 폭이 얼마나 넓었는지 알만합니다.

     

    메이지유신이 성립된 후 신정부에서 조대 대장대보(재무대신)를 맡아 무사들의 녹봉을 채권으로 전환시킨 질록처분, 지세를 수확량이 아니라 토지가격을 기준으로 매긴 지조개정 등의 재정개혁을 주도했습니다. 1870년대 말에 비등하기 시작한 자유민권운동에 동잡하여 의회 개설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는 정적 이토 히로부미에게 밀려 1881년 실각을 하게 되자 다음해 일본 죄조의 정당인 입헌개진당을 창당하여 자유민권운동을 계속했습니다. 평생의 정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외교력을 높이 평가하여 1888년 외무대신으로 입각을 시킵니다.

     

    개항 초기 서구제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개정 업무를 추진하다가 극우파어|게 테러를 당해 오른발을 잃었으나, 외무대신으로는 대체할 인재가 없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아 총 4차례나 외무대신을 지냈고, 1898년에는 총리 자리에 오릅니다. 1902년에 와세다대학을 설립하여 1907년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총장을 지냈고,1914년 두 번째 총리를 지내면서 1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승전국편에 서게하여 다이쇼시대 호황을 이끌었습니다. 1922년 85세로 사망했을때는 히비야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치루어진 장례식에 2만명이 운집하였고, 운구행렬에는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고합니다.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 7인(사가7현인)으로 나베시마 나오마사(鎬島直正. 사가번 10대번주), 오키 다카토(大木高任. 문부경), 시마요시 다케(島義勇. 북해도 개척사), 에토신페이(江購新平. 사법경), 사노 쓰네타미(住野常民. 적십자회 창설),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외무대신)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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