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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를 찾아보며
    낙서장 2018. 12. 15. 07:53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를 찾아보며

     

    조선일보사에서 테마여행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갈림길 “ 메이지유신발상지탐방” 안내 광고를 보고 참가신청을 했다. 신청이유는 내가 안중근 홍보대사로 일하기 때문에 안중근의사가  저격한 이등박문은 어떤 사람이고 그의 영향력을 알고 싶었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유신을 거론하며 정권연장을 했기 때문에 유신정신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의 개막은 1868년 3월 14일 16세의 어린 일왕(日王)이 또박또박 대국민 선언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천황이 국가를 직접 통치한다는 친정(親政) 선언이었다. 일본 근대 국가 수립과 제국주의의 원동력이 된 메이지(明治) 유신의 개막이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접근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내부의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은 에도 막부 차원이 아니라 지방 다이묘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산업 혁명이라 비유되는 집성관 사업이 사쓰마 번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를 통해 성장한 지방세력은 반막부세력을 형성하는데 주축이 되었다. 반막부 세력은 막부가 서구 열강의 무력시위에 힘없이 굴복하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것을 비판하였다. 마침내 반막부 세력은 존왕양이를 명분으로 하여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루었으며(1867),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유신을 선언하였다(1868).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회를 이루고자 하였고 서양 문물을 시찰하가 위해 이외쿠라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며(1871-1872), 사절단의 유럽 시찰경험은 향후 일본 근대화 추진의 초석이 되었다. 일본은 서양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삼았다. 징병제를 시행하여 근대적 군사제도를수립하였고 근대적 토지 제도와조세제도를 확립하여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의무 교육을 시행하여 근대적 교육 제도를 확립하고, 이를 통해 근대 국민 국가로 나아가도l자 하였다.

     

    1870년대에 이르러 일본에서는 서양식 입헌 제도 도입을 요구하며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하고자하는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자유 민권 운동  자체를 비판하였지만, 입헌제에 대한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89년에 메이지 헌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제국 의회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입헌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시 메이지 헌법은 철저히 정부 주도로 제정되어 천황에게 헌법상 막강한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처럼 일본은 천황제를 중심으로 위로부터 만들어지는 근대 국민 국가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번여행을 통하여 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과 유신체제를 실시했는지 공감가는 부분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육사 생활을 했으므로 일본의 유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3선개헌과 유신체제는 분명히 비민주적이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독재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헌법이 3선 을 금지했음에도 개헌을 했고 유신헌법도 기존 헌법의 절차에 의하지 않고 국회 해산 후 국민투표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3선개헌과 유신체제는 결코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그 배경에는 그러한 비민주적인 결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이 있었다. 우선 유신헌법을 선포하기 전 안보 상황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1968년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의 대통령 암살 시도는 박 대통령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북한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삼척과 울진에 공비를 침투시켜 국지전까지 일으켰다. 또한 1970년대를 ‘적회통일의 연대’로정하는 등 북한의 선동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9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월남전 종결을 선언하고 1971년 봄까지 30만 파월미군 감축을 발표했다. 인천상륙작전과 9·28수복을 주도한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 ‘아시아 방위의 1차적 책임은 자국이 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 선언 주한미군의 제2전선으로 의 이동은 박 대통령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자주국방에 박차를 가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한국 사회는 촛불세력을 등에 없고 정권이 교체된후 좌파세상이 되어 그들의 세력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아무거리낌없이 김정은 방문을 환영한다는 집회를 하기도한다. 이는 마치 5·16 이전과 월남 패망 이전 상황과 닮은꼴이라며 나라를 걱정하는 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에 통탄했을 것이다.

     

    조국근대화와 한국적 민주주의에 의해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가능케 했던 박정희 리더십을 국민들이 여전히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분명히 기록할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통령이안보 위협 속에서 국민들을 위해 울타리가 되어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리더쉽을 영원히 기록할 것이다.



    안중근의사가 저격한 이등박문에 대해서는 그는  우리의 영원한 적이긴 하지만  일본에서는 위대한 정치가로 존경받는것 같았다.  하급무사출신이로   본슈 하기에 있는 쇼카손주구에 운이 좋아 들어간 덕분에 일본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메이지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내각총리대신을 4번이나  역임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진출과 조선의 식민지화를 주도했다. 또한 그는 그당시  한국을 식민지하는 정한론   정책을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며  반대했다. 만약 안중근의사가 그를 저격하지않았다면  2차대전도 신중하게 했을것이고 일본이 그렇게 빨리 패전하지 않았을것이고 우리의 해방도 더늦어졌을것이다.


    일본유신을 주동했던 많은 리더들은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는 정치를 했다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경계국임에도 오늘의 우리나라 정치자들이 꼭 배워야할 할것이라생각했다.


                                           2018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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