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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흔적을 더듬으며낙서장 2019. 8. 15. 00:52
지난 70년을 돌아보며 기록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려했다. 초안을 써봤다.
양병택의 삶의 스켓치
어렸을 적 기억과 관련 자료을 근거로 옛날을 회상해본다. 양**을 아버지그리고 송**을 어머니로 하여 1942 음력으로 4월 7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미평리 315번지에 태여났다. 그당시 가족상황은 할아버지, 부모님 형과 여동생 2명 동생있었다. 만세력에서 음력 4월 7일을 찾아보니 양력으로 1942년 5월 21이었다. 그러나 면사무소에 출생 신고한 날이 5월 25일이어서 호적에 1942년 5월 25일로 되었다.
초등학교는 원삼면 좌항리에 있는 좌항국민학교에 다녔으나 지금은 좌항초등학교로 전체학생은 100여명으로 예전 400여명되던 것에 비하면 인구절벽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곳 홈페지의 명예전당에는 내이름이 올라있다. 별다른 공로는 없으나 나름대로 자원봉사 보스톤마라톤 참가등을 좋게 봐준것같다.
중학교갈 당시 1955년경에는 경제사정이 총체적으로 어려워 중학교가 없는 시골에서는 중학교유학이 힙들었다. 나는 고향에 있는 복음중학교에 입학했다. 그학교는 서울의 종교단체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실제는 중학교 인가가 없었으며 실제 명칭은 용인원예기술전수학교였다. 교실은 천막으로 지어졌고 강의는 선교가 목적이므로 주로 성경이야기, 농작물을 수학하기위해 작업시간이 많았으며 중학교과정은 영어 국어 사회 물상이 있었다. 설립자는 강태국 목사님으로 그의 포부는 농예를 발전시켜 지금의 '농촌 새마을' 건설하자는것과 같았다. 그분은 서울 새문안 교회 3대목사님을 역임하셨고 서울 성서대학교 창립목사님이기도 했다. 교장선생님은 숭실대학교 영문과를 나온 이근태 장로님이 맡고 계셨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학비조달이 곤란하여 망설이고 있었는데 형이 서울에서 정보통신요원양성을 위한 특목고인 국립체신고등학교가 있는데 장학금인 관비생이 있다는것을알고 그곳으로 보내려했다. 그러나 중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입학시험을 볼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대책없이 서울로 체신고등학교 입학시험보려고 서울로 가는 도중 양지역 근처에서 버스에서 우연히 동아일보 신문을봤는데 서울에 전기중학교 시험마감을 했는데 지원이 한명도 없었다는 기사를 보고 형님은 그 학교가서 내가 공부를 잘하는 천재라며 중학교 졸업장을 만들어서 사정하여 만들어서 그덕분에 체신고등학교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1958년 4월 4일 입학했다. 학교에 처음들어가서는 죽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60명중 반은 장학금을 받는 관비생이고 나머지반은 사비생이다. 한기말이나 학년말 종합시험에 의해 관비생과 사비생이 교체될수가있다고 했다. 서로 경쟁상태에 있으므로 난생처음으로 잠 안오는 약 카페나를 먹어가며 몇일간을 새워가며 공부한 기억이 있다. 일학년 일학기가 지나자 몇 명의 관비생이 사비생과 교체되었으나 다행이 나는 제외되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수학과 과학에 흥미를갖고 열심히 했다. 3학년때는 공작부 연구반을 맡아 활동하였고 이기간중에 공중전화가 처음 시중에 나와서 상용화 되었으나 오동작이 많았다. 그이유를 밝혀 연구발표를 하기도 했고 비가 많이 오면 자주 발생하는 침수에의한 통신케이불의 고장을 사전에 발견하여 고장을 예방하는 장치를 만들어 체신부 장관 초도순시때 시연을 보였다. 이덕분에 1961년 3월 7일 졸업식때 케이불 고장 자동발견기를 창작하였다는 공로로 장려상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배치하게 되어있었다. 우리과 졸업생을 모두 차에 태우고 각직장을 순회하여 배치하는데 일착으로 서울중앙전화국에 도착하여 4명을 배치하는데 내가 끼어있었다. 크라스장과 공부성적 1등 그리고 다른2명이 선발되었다.
앞으로 사회생활을 할려면 다시 대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으나 졸업후 3년간 의무 복무규정에 의해 직장에 들어가야한다. 직장도 필요하고 학력업그레이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주경야독의 길을 택했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2부 전기공학에 1961년 4월 5일입학하였다. 낮에는 전주에 올라가기도햇고 지하맨홀에 들어가 케이불 증설공사도 했다. 퇴근후에는 학교에 늦지않도록 서둘렀다.
63년 11월 26일 논산에 있는 육군 제이훈련소 입대영장을 받았으모로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고 육군 제 2훈련소(논산훈련소)에 가서 신체검사를마치고 29일 1124****의 군번을 받았다. 군대경력은 11월 19일부터 4주간의 전반기훈련을 마치고 후반기교육은 육군 원주에 있는 교환병코스(swithboard operater Course) 교육을 이수하고 1군단소속의 101부대 통신대대에 배속을 받고 그곳에서 교환병 시험병 정비병을 하면서 암프운영병으로 근무하다가 66년 6월 25일 만기 전역하였다.
육군전역후 1966년 9월 1일부터시작하는 2학기에 복학하여 68년 3월 20일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졸업후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 서울건설국에서 타회사로 전직하려했으나 전역후 재훈련에 불참으로 병역기피로 되어있어 타회사 입사시험을 볼수가 없었다. 68년 병무청에가서 재훈련을 신청하고 남양송신속 있는 서해안에서 4주간의 재훈련을 수료하여 한전에 대졸공채 입사시험을 보고 69년 2월 3일자로 입사했다.
한전경력은 69년 2월 3일부터 한전연수원에서 4주간의 교육을 받고 대전변전소 통신계에 근무했고 다시 서울전력소를 거쳐서 전자계산소로 71년 1월 18일자로 전입했다. 전자계산소에 운영과에서 4직급 간부시험에 합격하여 과장으로 승격했다.
4직급 과장은 77년3월 26일 부산지소 전산개발과장과 운영과장, 78년 7월 11일 서울 전자계산소 운영과장,개발과장을, 82년1월 11일에는 한전 본사 조사부 전산기획부 전산기술과장으로 사무화 담당과장으로 근무했다.
3직급부장으로는 83년 11월 5일 대구지소장으로 근무를했고 그후 85년 3월 22일 경영정보처 전산기술부장, 86년 7월 2일, 전자통신처 시스템 기술부장, 1990년 6월 11일 정보처리처 시스템개발부장으로 근무했다.
2직급으로 92년 6월 10일에는 승격하여 부산전자계산소장으로 근무하면서 학력을 업그레드하려고 93년 3월 2일 부산 동아 경영대학원에 입학하여 경영정보를 전공했다. 95년 8월 20일 석사학위를 이 취득했다., 1995년 2월 4일 정보시스템처 기술역으로 근무했고, 1998년 1월 20일처장승격예정자를 발표하여 소정교육을 마치고 1직급인 정보처리처장으로 98년 6월 1일 발령을 받고 근무하다 1998년 12월16일 퇴직했다. 퇴직 10년이 되는 2008년 7월에는 한전홍보실에서 그선배가 궁금하다는 제목으로 나의 인터뷰기사를 실었다.
퇴직후 앞으로 닥쳐올 기회르 놓치지않기위해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어 강남구청에서 개설한 영어연구원에서 전일제로 일년간을 공부했다. 레벨 2에서부터 6까지 있는데 6까지 마치면 미국유학시 영어선수과목을 면제해준다고하여 수강료가 고액이며 인기 있는학원이었다. 레벌의 기간은 2달이며 종합시험에 합격해야 다음레벌에 수강자격이 부여된다. 기억에 남는 것은 레벨 5때 논문을 제출하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음식문하를 홍보하기위해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신탕에 대한 논문을 써냈는데 표절로 간주되어 낙제를 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목표를 위해 다시 등록하여 수료했다. 레벨 6를 수강하는 도중 코익카 해외봉사를 지원함으로서 레벨 6는 수료하지 못했다.
자원봉사를 지원하려고 했다.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해보니 감사할것이 많았다. 특히 어려운 고등학교시절 3년간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인 관비로 학업을 마칠수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래서 일부라도 사회에 환원하자는 생각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싶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익카)에 해외자원봉사를신청했다. 지원조건이 나이가 만61세미만이어야 했는데 60세에 지원하여 코이카에서 최고령자로 선발되었다. 2002년 11월 14일 출국하여 스리랑카 2년간 현지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강사로 자원봉사마치고 2004년 12월 18일 귀국했다.
자원봉사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홍보를 위하여 코익카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미화하여 매스콤에서 소개했다. 덕분에 청와대도 가보고 조선일보에서 ‘앙콜내인생’ 란 제목으로 책을발간했는데 나도 그곳에 끼어 있었고, 동아일보에서는 금주인물 포코스에 스리랑카 봉사활동을 소개했고 KBS에서 2002년년말특집방송으로 나이 해외봉사활동내용을 소개했다.
외국에서 자원봉사를 하는동안 국내에서도 자원봉사를 하고 싶었다. 2005년 청계천이 복개된 것을 복원하여 친환경적 조성 프로잭트가 9월에 마치고 10월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그곳에 안내와 해설을맡는 도우미자원봉사자로 지원하여 자원봉사를 하였다. 2015년 3월부터 신당동박정희가옥에 전시물해설사로 자원봉사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청계천 안내봉사는 그곳 사정으로 2018년 7월부터 그 제도가 폐지되어 자리를 옮겨 서울 성동구 장안평에 있는 서울하수도과학관에 전시해설자로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자원봉사를하고 있다.
여가선용으로는 조깅의 왕초보가 2001년 1월초부터 1키로미터부터 시작하여 매일 거리를 늘여가며 운동을 하여 2001년 한해에 풀코스마라톤 울트라마라톤까지 완주했다 그후 스리랑카의 자원봉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보스톤마라톤 애드벤쳐 마라톤을 완주했고 산행으로는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등을 등산했으며 고산으로는 아나프르나 베이스캠프(해발4130미터)를 올라갈적 내려갈적 모두12일간을 산속에서 지내며 트래킹을 완주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통일전망대까지 걸어서 국토종주를 완주했고 자전거로는 아래뱃길에서 강변따라 낙동강 까지 종주했고 다시 서울에서 자전거를타고 서울에서 출발 강원도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동해안 7번국도를 따라부산 .남해안을따라 해남땅끝마을 서해안을따라 인천 그곳에서 아래뱃길 자전거길을따라 서울집까지 일주를했다. 이후 외발자전거를 타고싶어 구매하여 엉덩방아를 수없이 많이 넘어지면서도 연습을 하여 길거리를 어설프게나마 타고 다녔다. 지금도 산책길을 다니다보면 모르는 분들한테서 요사이는 왜 외발자전거를타지안느냐고 물어 오곤한다. 이제는 모두 지난 즐거운 추억이다.
2019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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