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 삼십여 년 동안 지주의 호사로운 살림을 하던 강택진(姜宅鎭) 씨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토지만 9천여 평)를 소작인조합에 내어주는 동시에 「소작인에게 告」한다는 글을 지어 그곳 소작회에 보내고 알몸으로 나선 일이다.
강택진 씨가 그 가진 재산을 버리고 나선 그 동기와 이유 등 씨의 사상 전체는 특히 금일 본지 5면에 씨의 글을 발표한 터…이 소문을 들은 그곳 부근의 지주들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더라.」(1923년 4월 26일『동아일보』)
하연(何然) 강택진(姜宅鎭, 1892-1926)은 개성유수부(현 개성특별시)에서 출생하여, 세 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를 찾아 풍기 금계리로 이주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던 중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19세 때에 모친상을 당했다. 20세가 되던 1911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1919년 3월 지린성에서 결성된 길림군정사 재무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해 6~7월경 귀국한 그는 10월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 13도총간부 교섭부장을 맡았다. 또한, 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자금 수백원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부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순흥의 김교림, 풍기의 이풍환 등에게 독립운동자금 출연을 권유하는 문서를 발송한 사실이 발각되어 1921년 3월 일경에 체포되었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 되었으나 이듬해 5월 건강상의 이유로 가출옥(假出獄)하였다.
출옥 후에도 1923년 1월 김동필(金東弼) 등과 함께 풍기소작인조합(豊基小作人組合)을 설립했고, 2월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4월「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는 폭탄선언과 함께 자신의 전 재산인 논 30두락(9,360평)을 몽땅 소작인조합에 기부했다. 그리고 그는 가족을 데리고 상경해 사회 활동에 매진하였는데, 아이스크림 장사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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