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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재가 국운’ 이라는 정석현 수산그롭의 회장 인터뷰를 읽고
    낙서장 2024. 11. 24. 16:32

     

    어제 11월 23일  신문에 수산그릅을 경영하는 정석현 회장님의 인터뷰 기사( 여기를 클릭하시면 보실수 있습니다.) 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인재가 국운이라는 것도 알았다고 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공감하면서 옛 추억을 떠올렸다.

     

    201811월경 조선일보에서 문화계획행사로 메이지 유신발상지 탐방 34일 여행계획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참가 신청을 했다. 그 당시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가옥에서 문화해설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많이 알고 싶었고 그와 관련하여 유신도 어떤 것인지도 궁금했다. 또한 안중근 홍보대사로 있었기에 안중근의사님이 저격한 이또 이토 히로 부미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그 여행의 안내는 이광훈 님이 맡으셨는데 그분은 상투를 잡은 선비,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란 책을 출판하셨다. 여행 전에 그책을 광화문 교보문고에가서 샀다.

     

    여행지는 하기였다. 하기는 죠슈번의 본거지였고 명치유신 의 정신적 발상지였다. 그곳 도시외곽에 요시다 쇼인이 세운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었다. 이 조그만 시골 학숙에서 종리대신등 명치유신의 주역은 물론이토 히로부미· 가쓰라다로 고로 등 조선 침탈의 주역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야마구치현에서는 메이지유신 후  그당시까지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하여 모두 9명의 총리가 배출되었는데97대에 이르는 내각 중 9명의 야마구치현 출신 총리가 조각한 내각은 모두 20(20.6%) 에 이를 정도로 일본 근현대사를 좌지우지했다고 했다.

     

    요시다 쇼인은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교육의 대상에 신분이나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분타(후에 이노우에 가오루로 개명),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 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이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1016일 조슈 번 스오 국 구마게 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 시) 야마구치현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1857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고 그후 우리가 아는 이등박문이 되었다.

     

    기자가 정석현 수산그릅회장에게 왜 기업인이 메이지 유신을 공부하는지 물었었다.

     

    투병 중이던 2011년 이광훈 작가가 쓴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를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내가 무지했구나 반성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근대화를 시도도 해보지 못한 조선의 차이가 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이광훈 작가를 만나고, 함께 일본 답사도 하면서 빠져들었습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외교력을 대하는 국가 지도자들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조슈번이 영국한테 지니까 영국으로 청년들을 유학 보냅니다. 사쓰마번도 적국인 영국에 유학단을 보냅니다. 왜 졌는지 배우라는 겁니다. 이걸 화혼양재(和魂洋才)’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의 혼()만 빼놓고 다 배우겠다는 거죠. 1868년 메이지유신 3년 뒤, 1871년에 일본 정부는 이와쿠라사절단이라는 대규모 유학단을 파견합니다. 최고위 권력자 3분의 1이 미국과 유럽을 110개월 동안 순방하며 근대를 배워 옵니다. 그 근대를 토대로 일본은 정치제도 개혁, 과학기술 진흥, 기업 설립을 추진하면서 근대화를 성공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근대화 추진을 외면했습니다. 선비들은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학기술은 쟁이들에게 시키면 되는 천한 하급 직능으로 생각하고 학문으로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지도자들 차이가 마치 극적으로 만든 소설 같습니다.”

     

     

    정회장은 인재(人材)가 국운이고 지도자의 인재 용인술이 국운이라고 강조했다. 과학 기술을 진보시킬 수 있는 인재 총합이 국력입니다. 국가 지도자가 이런 인재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국운이 결정됩니다. 그게 국운이 상승하느냐 쇠퇴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이런 것들을 메지유신에서 배웠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5·16 이후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과학기술인을 양성했고 수출을 장려했습니다. . 이게 한강의 기적을 만든 동력입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스토리보다 더 극적인 성취입니다. 박정희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메이지유신 3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막부 타도 연합을 연출한 사카모토 료마, 이들을 계승한 이토 히로부미와 근대 정신을 완성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해낸 일을 그가 해냈습니다.”고 했다.

     

    정석현 회장님의 인터뷰내용 에 공감하며 존경과 건승을 빌어본다.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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