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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의 의미
1.
삶의 출발은 누구나 다 같다. 그러나 도달하는 목표는 모두가 다르다. 동일한 방향에서 앞뒤의 거리가 있는것만이 아니다. 방향 자체도 제각기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의 발견과 완성이라는 일차적인 책임을 감당해야한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같이 종류로 구별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개체가 인간이다. 따라서 개성이 없는 인간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
만일 내가 없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무엇이 남겠는가? 나의 무無 는 그대로 세계의 공허를 가져온다. 내가 있음으로써 역사, 사회, 세계가 니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세계 속에 살게 되어 있으며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 세계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는 육체적 자아가 있고 정신적 자아가 있다. 이 둘이 합해서 하나의 인격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육체성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두 가지 면에서 언제나 공통성을 갖고 있다. 동일한 본능적 요소를 갖고 있으며 주어진 유래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육체에는 큰 차이와 구별이 없다. 인간을 육체만으로 따진다면 인간도 역시 한 가지 동물의 종류에 속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뒤떨어지고 보기 흉한 동물일지 모른다. 동물은 죽을 때도 이름다움을 앓지 않으나 인간의 우는 모습은 가장 보기 흉하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육체적 인간은 공간에 속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차이도 별로 없으며, 삶의 내용이 같으므로 가치를 평가할 표준이 없다. 유래성이라는 것은 육체적 자아는 이미 주어진 것이리는 뜻이다. 체격, 체질, 체력 등 모두가 날 때부터 주어진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됨은 육체적 자아가 아니다. 정신을 지닌 인격으로서의 자아이다. 우리는 육체가 없는 인격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 자아야말로 니를 만드는 자아이다.
그러면 이러한 자아는 어떻게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가? 인간은 오랫동안 육체라는 자연의 껍질 속에서 살아야 한다. 본능이라논 울타리 안에서 삶을 누린다. 그러는 동안에는 정신적 자아가 나타나지 않는다. 자아의 발견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육체와 본능의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서는 때가 찾아온다. 그때 비로소 내가 니를 보고 알게 되며 지아의식이 움트게 된다. 우리의 정신이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적 자각이 없는 동물은 죽을 때까지 자아의식을 갖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거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자아의식은 언제 나타니는가. 자신에 대한 자각 어떻게 가능한가. 사람들은 그것이 넓은 의미의 교육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자라고 지아 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교육은 넓은 의미의 체험이다. 그리고 정신적 사고를 뜻한다. 여러 가지를 체험하고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아를 발견하게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교육이 계속되는 동안 인간은 꾸준히 자아를 찾아 성장하는 것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 새로운 사색을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갈 능력을 잃는다.
그러나 자아의식을 남달리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연하게 자아를 느낄 뿐 뚜렷한 개성과 까않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100의 자아의식과 20의 지ο}의식을 갖는 사람이 같다고는 볼수가 없다.
그러면 강렬한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은 어떤 성격의 인간인가. 자아 속에 남다른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깊고 중요한 문제를 갖는 사람은 그만큼 자아의식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문제로 만족히는 사람은 자아의식도 빈곤하며 그에게는 확실한 개성이나 뚜렷한 자아성이 없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한 문제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그만큼 지아 의식도 뚜렷해진다. 사상가는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남보다 다른 자아성을 지니고 산다.
이 문제는 육체나 본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자기통일과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찾아 누리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성격의 교육도 두 가지 책임을 가진다. 처음 과정은 자어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며 다음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중학년 때까지는 정신적인 성장을 돕는 일반적인 교육으로 그친다. 그 이상의 것은 아이들이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상급반이나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어떤 문제의식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전공의 선택이나 생의 방향 결정이라고 부른다. 만일 우리 가운데 전공과목을 내가 선택할 수 없었다든지, 대학에 다니면서 남다른 문제의식 없이 세월을 보내왔다면 그것은 질적 로는 고등학교의 연장일 수는 있어도 문제의식이 뚜렷한 대학생 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공과에서 기술은 습득할 수 있고, 상과에서 부기 이론은 배울 수 있어도 자신의 문제를 갖고 자기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으로는 성장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 발견은 지아 의식에서 오며 그 자아의식은 문제의식에서 싹튼디는 결론을 얻게 된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느냐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 지었는가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가와 통한다. 우리가 젊은 지성인들에게 문제의 소유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이렇게 본다면 인간 및 지아의 성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 지음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찾으며, 더욱 높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좀 더 높은 자악아 형성된다는 원리로 설명할 수있다.
큰 문제를 해결 짓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대단치 못한 문제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그만큼 생의 의미를 풍부히 할 수가 없다. 하찮은 문제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값있는 인생을 살 수가 없으나 귀중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자연히 위대한 삶을 개척해 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갖게 되는가. 문제는 한없이 많다.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문제를 가질 수 있으며 같은 사람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문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그 문제들을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정신적 삶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들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생활에 속하는 문제들이다. 전자에는 학문, 예술, 사상, 도덕과 같은 정신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한 문제들이 속하며, 후자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들이 속한다.
물론 이 두 부류의 문제는 서로 구별될 수도 없으며 별개의 성격을 갖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사회적 의미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고, 정치도 사상적인 과제를 제쳐놓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 정신적 과제로 출발하여 정신적 결실을 얻으며, 정치가 사회생활의 변동과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음은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 두 가지 면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학자, 예술가 사상가가 되어 정신적 생활에 기여하고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정치나 경제의 일선에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종류의 문제를 택하든지 이 문제의 발견과 발생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및 역사와의 관계에서 이뤄지고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만일 우리의 정신적 안목을 자기의 본능이나 폐쇄적인 자기 속으로 가두어 버란다면 우리의 정신적 자아는 아무 문제도 찾아 누리지 못한다. 나의 정신적 자아가 나를 둘러싼 역사속에서 얻는 것이 정신적 과제이며 나의 인격적 지ο}가 나와 더불어 있는 인간들과 사회 속에서 얻어 갖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역사의식이 없다든지 사회의식이 빈곤한 사람은 문제 다운 문제를 발견하지도 못하며 그 문제에 의한 자기발견과 자아성장도 의미를 잃는다. 평범은 귀할 수 있어도 자아가 없는 평범은 의미가 없다. 값있는 일생을 살기 원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역사와 사회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문제를 갖는다는 뜻이며, 대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니를 사회 속에서 발견한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리라는 생각 없이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보다 한국의 경제를 걱정하는 실업인이 귀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고 명예와 지위만 탐내는 정치가보다는 삶의 사회적 의미를 묻는 이름 없는 젊은이들이 귀하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갖고 현실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죽은 물고기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같이 생명력이 없는 인간에 그치게 된다.
3.
그러면 이러한 문제를 가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확하고 투철한 현실 파악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바르게 깨닫는 능력이 있어야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볼수 없는 사람은 언제나 진실을 모른다. 진실에 입각하지 않고는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진실이 없는 곳에서 판단을 내린다면 그것은 허구가 되며 그 판단의 결괴는 위험성을 동반한다.
우리가 선입관념의 노예가 되거나 주관의 아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값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의 사르트르나 메를로풍티 같은 철학자는 세계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그들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한국전쟁은 미국이 일으켰으며 소련이 평회를 위한 휴전으로 이끌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만일 이런 과오를 우리가 범하고 있다면 우리의 판단과 행위는 언제나 무가치하며 사회적으로 불의와 해악을 끼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나 사회 현실을 바로 보며 정당하게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 빠져버리거나 현상을 객관시할 수 없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는 지성인이 못 되며 대학인다운 자격을 잃는다.
히틀러 정권하의 독일인들이 그런 과오를 범했으며 태평양 전쟁직전의 일본 지성인들이 같은 현실에 말려들었다. 그 결과가 세계적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한때 독일의 대학들보다도 이름 없는 기독교인들 이 독일의 운명을 바로잡는 데 더 귀중한 책임을 감당했다고 말한바 있다. 기독교인들이 현실을 더 바르게 보았으며 독일의 장래를 뜻 깊게 걱정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인가. 현실과 현상을 올바르게 파악한 뒤에는 그현실에 참여하는 용기와 책임이 있어야한다.
옳지 않은 것을 옳게 만들며, 악한 것을 선하게 만드는 용기와 참여가 없다면 불의와 악을 누가 제어할 수 있겠는가. 정신적 문제나 사회적 과제에 공통된 바가 있다면 가치 판단에서 반가치적인 면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불의는 어디서나 용납될 수 없고, 악은 언제나 배격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반가치적 요소를 우리들의 삶과 사회에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 즉 역사와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생활의 진리는 침여의 진리이다. 참여가 없는 진리는 언제나 진리가 될 수 없다. 관찰자는 현상 밖에서 현실을 관찰한다.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을 얻지 못한다.
문제 해결은 앎의 행위의 문제로 심화되며 행위가 없이는 참다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만일 아무 노력도 없이 자유나 평등이나 평회를 얻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환상가이거나 명상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진실한 판단이 이상이 되고, 그 이상이 구현되기 위하여 우리의 참여 행위가 필요해진다. 말하자면 문제의 해결이 사회 · 역사적으로 가능해지는 셈이다.
4.
만일 우리의 정신적 과제가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의 자아발견은 그것이 그대로 자아성장이 된다. 내가 얻은 문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남는 문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발견에서 성장의 과정을 얻은 우리가 자기 완성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가이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완성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완성을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완성이 과연 가능한지는 언제나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완성은 인간이 신과 같이 완전해진다는 뜻도 아니며 흠잡을 것이 없는 인격의 완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의 의미를 영구한 것으로 만들며 그 가치를 최선의 것으로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세상의 만물은 모두가 자신을 완성으로 이끌어갈 의무가 있다. 완성을 위한 노력이 삶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완성을 육체적이거나 자연적인 욕망에서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인간의 운명적인 과정이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로 돌릴수는 없다.
그렇다면 완성은 어디서 오는가.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즉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예수의 유명한 비유를 기억한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열매를 맺고,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게 된다는 교훈이다. 밀알은 반드시 썩어서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 자기완성이 가능해진다. 그 책임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밤의 암혹을 몰아내기 위해 춧불을 켠다. 초는 불타서 사라지고 만다. 초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초는 빛으로 바뀔 수 있어야 그 빛이 우주에 영원히 남을 수 있다. 그리고 암흑은 그 힘 때문에 자취를 감춘다. 썩어가는 밀알과 불티는 초가 된다는 것은 밀알이 제구실을 하며 초가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 이론이 통한다. 내 육체를 아끼고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것은 헛된 수고로 그친다. 오히려 사회와 역시를 위해 값지게 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때 그 노력의 가치가 영구히 남게 되고 우리는 삶을 완성할수 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죽고,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산다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 값진 것을 위해 나를 바치면 더 값진 삶을 살 수 있다. 만일 영원한 것을 이웃과 사회에 남길 수 있다면 우리 삶의 의미는 채워지며 우리는 영원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 말고는 자기완성의 뜻을 찾을 길이 없다. 종교적 신앙이 영원한 삶을 가리키는 것도 그와 통한다. 버림받아야 할 무가치한 육체와 본능적 삶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는 생각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원하다는 것은 삶의 의미가 실재寶在로 바뀐다는 뜻이다. 살았다는 뜻이 영원히 남을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예수는 그것이 신의 뜻대로 사는 일이라고 가르쳤고, 석가는 진실에서 중생을 위하는 수고라고 알려주고 있다. 개인적인 삶의 의미가 이웃과 역사에 영구히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아침 읽은 김형석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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