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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여신상 생각하며 느끼는것
    낙서장 2018. 8. 26. 18:22


                     자유여신상과 만든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

     

    대한민국은 자유와 경제를 축으로하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런데 요사이 정부는 이를 무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정부수립은 70주년이라고하면서도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이야기는 입도 뻥끝하지않는다.

     

    책을 읽다가 미국에서 독립100주년 기념으로 자유여신상을 세웠다고 하는 글을 봤다. 지금 우리가 건국기념믈 세운다고 한다면 무엇을 세울까? 호기심이 있기도하고 걱정도 되기도한다.

     

    자유여신상을 조각한 사람은 불란서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Frederic Auguste Bartholdi) 이다. 그는 183482일에 유복한 집안에 태여났다. 그러나 바르톨디가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머니는 들 프레데 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와 세 살 많은 형 샤를 바르톨디를 데리고 파리로 상경했다. 그곳에서 남편 친구인 은행가의 도움을 받아 혼자 을 키웠다. 어머니의 헌신은 바르톨디의 인생과 작품에 영향을 미치게된다.

     

    1870년과 1871년의 프랑스 · 독일 전쟁 기간에 바르톨디는 국민근위대에 들어가 고향이기도한 알자스의 콜마르 방어 전선에 참가했다. 하지 콜마르 전선은 무너지고 프러시아 군인들의 손에 장악당했다. 바르톨디는 새 정부의 연락책으로 일하다가 이탈리아의 혁명가 가리발디의 부관이 되기도 했다. 고향 콜마르를 잃은 것은 바르툴디에게는 상처로 남았다.

     

    프랑스 역사학자 에두아르 드 라불레가 남북전쟁이 끝나고 처음으로 제안한 자유의 여신상에 바르톨디는 큰 흥미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고향을 앓은 상황에서 그것의 공식 명칭인 "세계를 밝히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가 가슴에 와 닿았다. 바르톨디는 미국과 프랑스의 우애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적인 사업을 구체화하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섬과 거의 정면으로 마주보는 리버티 섬에 동상 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1872프랑스-미국 동맹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자유의 여신상건립이 드디어 가시화되었다.1876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인 불과 손은 그 5년간 뉴욕의 매디슨스퀘어에 전시되었다. 바르톨디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여신상의 머리 부분을 선보였다. 모텔은바르톨디의 어머니였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면 왼손에 들고 있는 석판에는 로마 숫자로 177674일’ 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여신상의 발치에 끊어진 노예제도의 사슬이 보인다. 원래 〈자유의 여신상〉은 1884년 7월 4일 미국에 공식 인도되기로 되어 있었으나 .1886년 10월 28일 그루버 클리블런드 대통령 취임을 기념해 건립되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151 feet (46.02 m)이나 좌대를 포함한전체 높이는 305 feet (92.96 m) 이다. 1924년 10월 15일 세계문화유산으로지정되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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