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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박정희를 흠모하며낙서장 2019. 1. 3. 03:32
2019년 1월 2일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어 첫 근무날이다. 이날 신당동 박정희 전 대통령 가옥에 첫 자원봉사자로 봉사하는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 있고, 즐겁고, 행복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려웠던 시절 우리들에게 하면 할수있다는 We can do 정신으로 경제적으로 위대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신 대통령이었다.
우리는 할수있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정신을 생각하며 작년박정희 대통령탄생101주년기념 특별좌담회가 2018년 11월 6일에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는데 그중 장인순 박사님(전원자력연구원장)의 강연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어 이곳에 올려놓는다.
2019년 1월 2일
박정희정신? We can do.
반세기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시아, 아니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한다. 보릿고개와 배고픔이 상식으로 통했던 시대- 대한민국은 문화·경제 식민지, 그리고 과학기술 식민지라고 정의하고 싶다. 남은 것은 상처받은 민족혼과 절망 그리고 허리가 잘린 한반도.
대학 3학년 때 4·19혁명을 일으켰던 데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4학년에 진학하고 5월에 바로 ○○이라는 학생군번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어느 날 훈련병 막사가 좀 소란스럽더니 “오늘은 훈련이 없다”면서 쉬라고 하는데, 모두들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해 했다. 저녁 늦게야 5·16혁명이 일어나 훈련소장병들이 모두 서울에 갔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5·16혁명에 대해 우려 반 기대 반 했던 것이 사실이다. 군대를마치고 복학해 졸업(1964년)할때 40여 명이 함께 졸업했다.
동기들 중 유일하게 나만 졸업 전에 국립공업연구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그때는대학 졸업생들이 갈곳이 전혀 없었던 시대였다. 첫 월급으로 4.300원과 밀가루 한 포대를 받았다. 당시 연구소 근처 하숙비가 월 4.000원이 었다. 연구소를 다니면서 가정교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필자도 대학원까지 5년 동안 가정교사 생활을 했지만 많은 가난한 시골 학생들은 가정교사를 하지 않고는 대학을 다닐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상처받은 민족혼을 일깨운 새마을 노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 마을 노래를 우리 국민이 얼마나 열심히 부르며 일터에 나가 땀을 흘렸는가? 땀 흘려 일하는 노동 예찬은 박정희 대통령의 중요한 시대정신의 하나다.
“이등 객차에서 프랑스 시집을 읽는 소녀야”라는 시가 그 증거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 이등 객차에서 프랑스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절망과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땀을 흘리고 용기를 얻도록 시끄러운 기계소리를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국가 원수의 한과 절규가 소녀의 고운 손마저 맙다고 했으니….
차관을 얻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문전박대를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정부의 곡간은 텅 비어 있고, 천연자원도 전혀 없는 자원 빈국(貧國)인 대한민국은 외국에서 돈을 빌려오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국가 원수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돕는다고 했던가? 마침 서독에서 많은 광부와 간호사가 필요하던 차에 서독 정부의 주선으로 서독을 방문 해 당시 한국의 재정으로는 엄청나게 큰돈인 1억 4,000만 마르크를 간호사와 광부들의 봉급을 담보로 얻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비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서독에서 대통령과 영부인이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함께 한 없이 흘린 뜨거운 눈물이 오늘의 조국 근대화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1,000m의 뜨겁고 캄캄한 지하 탄광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탄을 캐는그들의 힘겨운 삶과 체중이 2~3배가 넘는 덩치 크고 무거운 환자를 돌보는 가냘픈 간호사들의 힘겨운 삶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65년 우리의 분신을 팔아 이룬 기적의 1억 달러 수출
대학원 재학 중이던 그때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뉴스가 모든 언론을 장식했다. 도대체 무엇을 수출했단 말인가? 수출상품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의 산업현황을 쉽게 알 수 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꽂이나, 곰 인형 같은 수공예 장난감이 대부분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팔아 곡식을 사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 중요한 수출상품이 되었다. 머리카락은 우리의 분신이다. 그래서 우리의 분신인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들고 수출하여 기적의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수공업에서 차츰 기계 산업으로 발전해가는 전환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열사의 땅, 중동에서 흘린 많은 건설 노동자들의 피와 땀, 베트남 전에 참전한 아까운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벌어들인 외화가 조국 근대화의 밑 거름이 되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 다(Freedom is not free). 자유도, 그 어떤 것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시대정신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쓴 “금강산” 이란 시가 있다.
금강산 일만 이천봉 너는 세계에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하므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 같이 헐벗었으며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여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1969년 1월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렸던 겨울 딱 100달러와 어머니가 주신 태극기 한 장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던 날,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본 조국은 그야말로 벌거벗은 산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동해 바다를 지나 보이는 온통 나무로 덮여 있는 일본을 보면서 참으로 참담했던 생각이 난다.
그후 10년 뒤에 귀국하면서 본 대한민국의 산하가 완전히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단언컨대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에서 보여준 시대정신이 없었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에는 산림녹화는 물론 우리의 잠든 혼을 일깨우는 큰 뭇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산지가 70%인 헐벗은 산하는 비가 오면 엄청난 산사태를 일으키고, 가뭄에는 물 부족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산림녹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상 세계 어느 나라도 조림과 산림녹화에 성공한 예가 없다.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산림을 깎아내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면서 친환경 에너지라고 하니…. 진정 무엇이 친 환경인가? 그렇게도 무지하고 우매할 수 있는가?
수많은 신화를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
도로는 인간의 혈관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때까지 한국 역사상 가장 큰 프로젝트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1968년 건설 착공현장에 당시 야당을 상징하는 정치인 김대중과 김영삼 등이 반대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2년 5개월 만에 완성된 고속도를 기념하는 금강휴게소의 위령비에는 희생자 77명의 산업 전사들을 기리는 글이 있다. “세상에서 금옥보다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이 가진 피와 땀”이라고.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최단기간에 우리 기술로 건설하면서 수많은 신화를 창조했다. 이때 우리의 토목기술이 큰 성장을 하면서 사막의 나라 중동의 다양한 건설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세계에서 최고층 빌딩, 최고의 교량을 건설할 수 있는 건설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최대의 모험은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
에너지 자원 세계 최빈국인 대한민국. 전기는 산업의 꽃이라 했는데, 이 시대에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근대 산업화 시대에 전력은 물이나 공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다. 에너지의 97%를 해외에 의존하는 에너지 자원 빈국인 대한민국이 에너지 자립을 위해 할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놀라운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고급 인력도 부족하고 자본도 없는 이 나라에서 고도의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결심했다는 사실이다.1970년대 초 정부의 1년 예산이 6,500억 원이고, 1인당국민소득 200달러 정도였던 당시, 고리 원전 1호기 건설비가 1년 정부예산의 4분의 1이었다(참고로 지금은1년 정부 예산으로 150 기의 상용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다) .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비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주저 없이 건설을 명했다. 필자도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이요, 무모한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1977년 고리 1호기가 발전을 시작하면서 이 땅에 원자력 발전 시대를 열었고, 그 후 전두한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제는세계에서 원자력 발전소건설의 제1위 국가로 우뚝 섰다.
그 뿐인가. 우리는 대형 상용 원자로 해수 담수와 전기를 동시에 생산하는 스마트(SMART) 원자로 연구용 원자로까지 3종의 원자로를 수출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원 의존형이 아닌 기술 의존형(두뇌 의존형)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원자력은 두뇌가 만드는 에너지다. 만약 농축을 비롯하여 모든 원자력 주기기술을 완성하면, 원료인 우라늄 원광 값은 전체 생산가의 3%도 안 된다.
화석 에너지는 원료가 전체 생산가의 80% 이상을 차지하지만, 원자력은 단 3%에 불과하다. 에너지 자원 빈국인 우리에게 원자력 산업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예지력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허구와 공포로 짜깁기 한 ‘판도라’ 영화 한편에 눈물을 흘리면서 탈핵과 탈원전을 선언하고, 그것도 모자라 비전문가 집단의 공론화를 통해 원전 건설 찬반을 묻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놀랍게도 현명한 젊은이들이 교육을 통해 원전 건설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결과를 내놓았으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비전문가 집단에 국가의 중대사를 맡기고 그 결과마저 받아 들이지 못하는 국가원수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참으로 슬프고, 쓰리고, 안타깝고 한심한 생각밖에 안 드는 것이 어찌 나 혼자만일까? 앞으로도 100년 이상 쓸 수 있는 기름을 땅속에 가지고 있는 산유국이 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걸까? 21세기 불가사의가 있다면 바로산유국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일 것이다.
한국의 자동차와 조선업을 키운 포항제철을 건설
철광석도 없는 나라가 철광석을 수입해 제철소를 건설한다니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를 했겠는가. 남는 것은 엄청난 양의 폐기물 뿐이고 국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리가 만일 포항제철을 건설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자동차 산업과 조선 산업이 이 땅에 이렇게 발달할 수 있으며, 거의 모든 국민이 차를 소유할 수 있겠는가. 모든 기계 산업 자동차 산업이나 조선 산업은 용접기술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 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놀랍게도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를 턴키로 건설하면서 외국인들로부터 배운 첨단 용접기술이 고스란히 조선 산업으로 전수되었다는 사실이다. 불가사의한 일은 제철산업뿐만이 아니다.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가 중화학공업을 한다고 하니 당시 화학 교수, 화학공학 교수,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 반대를 했겠나. 현재 대한민국의 수출상품 중에서 석유제품이 반도체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 중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의 수출을 이끈 것이 석유제품이다. 중화학공업의 발달로 해외에 수많은 플랜트 즉 해수 담수화 석유시추선 등 기계류와 플랜트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박정희정신,We cando!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
나는 우리 세대가 한국 산업화 시대의 막내둥이라 생각한다. 가난과 굶주림을 경험하면서 인내심을 키우고 자존심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허리띠가 양식이었던 시대, 배가 고파 책을 읽고, 먹을 것이 없어 꿈을 먹고 산 세대는 수많은 꿈을 이루었다.
그 시대 박정희 대통령, 정주영 회장, 그리고 이병철 회장 등과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면서 이룬 대한민국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우리도 할 수 있다(We can do)는 정신을 일깨워주고, 상처받은 민족혼과 자존심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공업 선진화를 이루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힘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많은 반대 여론을 뛰어넘어 성공시킨 특유의 시대정신이다. 그것은 바로 나라사랑, 국민사랑과 미래를 읽고 예측할 수 있는 예지와 통찰력, 열정과 끈기, 그리고 우리 국민의 우수한 두뇌에 대한 믿음이라 생각한다. 우리도 할 수 있고, 어떤 것도 피와 땀을 흘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박정희 정신이 이룬 공업화· 산업화· 선진화는 배고픈 국민들 밥을 먹이는 토대를 만들었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족노조 전교조를 만들어냈다. 이들이 산업계와 교육계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 불확실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기슴 아프다. 나는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뿌리를 내린 분은 박정희 대통령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계 어디에도 ‘배고픈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4강의 틈에서 자주국방을 강력히 주장했던 그 정신을 온 국민이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 나는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이 하늘에서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인순 :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장(전) / 원자력환경기술원 원장 / 한국원자력연구원고문
김대중 전대통령이 반대했던 사실이 허위라고 글이 있어 학인하기위해 인터넷으로 검색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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